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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5 17:47 일본
기록영화라는 측면에서 이 긴 유튜브 영상을 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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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
2016.02.10 13:15 일본


 

위 이미지는 일본의 어느 최대 SNS업체에서 아베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수십개의 스마트폰을 펼쳐놓고 댓글을 열심히 달고있는 '덴츠 공작원의 일하는 풍경'이란다!

 

일본 트윗에서 이 이미지를 접하고 드는 생각은 지난 대선때 국정원에서 바로 저 짓거리를 국민 세금을 주면서 했구나!하는 탄식이다.

 

위 이미지를 보면 총 54개의 스마트폰이 18개씩 상하 3열로 진열되어 있고 덴츠(電通) 공작원이란 여자가 열심히 댓글을 다는 중이다! 이런 배열이 이미지엔 총3개가 잡히는데 아마도 수십개의 배열세트가 존재할 것이다!

 

댓글 내용이야 아베지지율을 끌어올리기위한 목적이니 뻔한 내용일테고 이 화면 저 화면 옮겨 다니면서 댓글을 다는 중인데 너무 뻔하고 지루한 작업이라 처자 얼굴이 심드렁하다! 

 

처자 얼굴을 보니 10대 후반의 나이로 보이며 상당히 앳되 보인다. 사무실이 추운지 옷을  두텁게 입고 슬글슬금 찾아오는 졸음을 커피를 마셔가면서 한손가락 신공으로 심드렁하게 댓글을 달고 있다! 

 

일본의 최대 SNS회사에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다!


http://www.amn.kr/sub_read.html?uid=2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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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
2016.02.10 12:40 일본

십자가 군기 펄럭이며 조선을 침략한 일본 천주교 십자군을 보라!

 

 

 

 

 

 

왜병들의 십자가 깃발을 처음 본 조선 병사들은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십자가 군기 펄럭이며 짓밟고 지나간 거리에는 온통 시체로 산더미를 이루었다고 한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사』에는 그때의 참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서울 시내에서는 수구문 밖에 내다 버린 시체가 산더미 같으며 명군이 조선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온 그들이 취포(醉飽)한 음식 찌꺼기 또는 그들이 구토한 음식을 서로 다투어 주워 먹고 약한 자는 그것도 주워 먹지 못하여 호곡(號哭)하였다.”

 

임진왜란과 천주교가 역사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것을 부인할 길이 없다. 이에 관련해 민경배는 그의 저서 『한국기독교회사』에서 아래와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 십자가의 표지 아래서 이들이 남달리 인간적이요, 덜 잔인한 살상을 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찾아볼 길이 없다. 우리 겨레 역사의 한에 사무쳐 뼈에 스며 있는 악랄한 일본 군인의 만행에 대해서 이들은 예외가 될 만한 행동 하나 남겨 놓지 못하고 있었다.”(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38쪽). 

 

왜군들은 심지어 금줄이 달린 집에까지 들어가 산모와 갓난아기의 코까지 베었다. 갓난아이들은 죽은 엄마의 젖꼭지를 빨며, 어린 아이들은 거리를 방황했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은 당시의 재난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때에 적이 3도(道)를 짓밟아 지나가는 곳마다 여사(廬舍)를 모두 불태우고 백성을 살육하였으니 무릇 우리나라 사람을 보기만 하면 모조리 그 코를 베어서 공(功)으로 삼고 겸하여 시위하였다.” 세계 전쟁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혹한 만행이었다.

 

이런 만행에 기리시단도 가담자였다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천주교도 왜군 장수 구로다가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실로 일본 십자군의 만행은 중세 십자군의 원정에서 보인 죄악상과 전혀 다를 바 없다.

 

 

↑ 임진년 4월 15일 부산 동래성에 집결한 고니시의 왜군.

기수병들이 십자가 군기를 들고 있다.

 

 

↑ 성을 포위하고 조선군에게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는 고니시의 일본 십자군.

 

  

↑ 임진년 4월 15일 부산 동래성에 집결한 왜군.

왼쪽 깃발에는 십자가와 천사의 나팔을 형상화한 고니시의 부대 마크가 보인다.

왜군에게 길을 내주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던 동래부사 송상현과 그의 군사들..

그러나 전투 개시 두 시간 만에 동래성은 일본 십자군에게 함락됐다.

이날 전사한 군사와 백성의 수는 모두 3000명, 포로가 된 자는 500명에 이른다.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한 장면 캡처)



↑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 장군의 조선군을 조총으로 유린하는 왜군.

천주교 신부가 종군사제로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과

신립이 이끄는 조선 경군(중앙군) 병력이 격돌한 충주 탄금대 전투(忠州彈琴臺戰鬪) 장면.

당시 8만 명의 조선군이 전멸했다. 1592년 4월 28일.

 


↑ 후퇴하는 조선군을 십자가 군기 휘날리며 추격하는 기리시단(吉利支丹왜군.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한 장면 캡처)


예수회는 동방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선교의 목적으로 항해사들을 포섭하여 배를 타고 멀리 멀리 동양으로 가서 인도 명나라 일본에도 진출 기지들을 설치하고 서양의 선진 문물들을 줌으로써 무역적 이득도 취하였다. 그런데 유독 조선만이 예수회는 물론 서양 사람들을 모조리 추방해버리니 예수회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접근해서 조선 정복의 야망을 부추긴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당하자 예수회는 히데요시에게 접근했다. 예수회 신부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를 보면 당시 예수회는 오다 노부나가를 매우 선호했는데 노부나가가 죽자 크게 낙담했으며 히데요시는 외모도 인물됨도 하찮아서 실망했지만 그래도 예수회 신부들은 히데요시를 ‘하나님의 칼과 채찍’이라고 극찬하면서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 임진왜란 때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예수회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예수회를 광신하는 자였던 바, 히데요시가 고니시를 제1군 선봉장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통틀어 계속 임명하고 신임한 것도 바로 예수회 때문이었다.

 

결국 임진왜란은 예수회의 동방진출 야욕에 의해 일어난 것이고 예수회 신부들이 왜군을 따라 종군하여 조선 땅을 밟고 다니며 소위 ‘성수’를 뿌리면서 일본 십자군을 축복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임진왜란 편에 등장했던 장면 캡쳐 사진

조선을 침략한 왜군 전함에 있는 십자가 마크를 보라!

 

 

 

 

 

 

 

 

한국 천주교 상징 마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2005년 3월 둥근 원 안의 십자가 표시(사진)를

공공시설 및 각 성당에서 천주교를 상징하는 표시로 삼기로 확정했다.

저 마크는 조선인을 가장 먼저 학살한 왜군 선봉부대의 십자가 군기에 있었다.

이런 표시를 한국 천주교가 상징 마크로 사용하는 것이 가당한지 의문이다.

이 표시는 198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의 로고로도 사용되었다(아래 사진).

 

↑ 조선을 침략한 왜군 전함의 돛과 군기에 있던 바로 그 십자가 문양.

선인은 이것과 똑같은 십자가 마크 아래서 

아우구스티노(소서행장)가 이끄는 일본의 천주교 십자군으로부터 무수히 학살당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문구가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는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있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여러 번 만날 정도로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프로이스는 30년 가까이 일본에 체재하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 들었던 갖가지 사실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훗날 ‘일본사(Historia de Japam)’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 책은 진주박물관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국립진주박물관).

 

포르투갈 리스본 국립도서관 발행 원본 표지

(원본 자체가 오래 되어서 표지 색깔이 저렇게 누렇다.)

국내에는 210~360 페이지짜리 단행본 1권으로만 나왔는데,

일본판 완역 루이스 프로이스는 12권짜리 시리즈이다.


 

일본에서 오랜 기간 활약했던 예수회 사제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문헌으로서 정독할 가치가 있다. 프로이스가 쓴 이 책을 보면 조선을 ‘이교도’라고 기술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성모 마리아를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느님이 쓰시는 칼(“우리 주 하느님은 이 사람 곧 관백 히데요시를 일본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검과 채찍으로 선택하셨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하느님의 聖戰으로 적었다.


또한 프로이스(Luis Frois)는 ‘일본사’ 결말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리하여 7년에 걸친 조선 전쟁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우리(일본인) 천주교도들의 커다란 노고와 비용 지출 위에 지속되어 왔던 것으로 천주교도 영주들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유리한 측면도 있습니다...약(略)...하느님은 진실로 선하신 분이므로 성스러운 주님의 영광을 위해...약(略)...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적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승리에 관한 가장 기쁜 소식을 이제 머지않아 접하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1598년 10월 3일 나가사키에서... 성스러운 주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이처럼 임진왜란은 사실상 천주교 십자군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강강수월래(江江水越來)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조선은 일본 십자군에게 정복을 당해 예수회 사제와 천주교 신부들이 당당히 포교활동을 펴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조국은 어떠한 모습일까? 우리나라는 필리핀처럼 아시아를 대표하는 가난한 천주교 국가로 전락해 있을 것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로마 종교가 들어간 나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대부분이 카톨릭 국가이다.

 

미와 북미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경우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및 모든 동구권 국가들이 가장 가난한데, 이들의 공통점은 천주교가 국교라는 점이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을 보면 남미는 북미보다 더 자원이 풍부하지만, 국민들은 무지하고 생활수준은 형편없다.

 

성웅 이순신은 배교교회인 로마 카톨릭 세력으로부터 우리 조선을 지키려고 하나님이 사용하신 위대한 그릇이었다. 그는 왜적들의 사기를 꺽고 조선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해 부녀자들로 하여금 "강강수월래"라는 승리의 영적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강강수월래(江江水越來)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깊은 물을 건너와서 -水越來- 미리암의 선창으로 춤추며 찬양한 승리의 노래를 여자들을 총동원해 재현하여 부른 것이다. 애굽 군대가 강해도 망하고 이스라엘이 약해도 구원받음 같이 조선은 약해도 “홍해를 건너간다” “요단강을 건넌다”고 믿음으로 선포하며 춤추고 노래한 것이 강강수월래(江江水越來)이다.

 

이순신은 상제(上帝;: 하느님)께 기도하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당시에 명나라~중앙아시아~서역의 교통으로 성경을 보고 읽고 아는 자들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백성들과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 고양하기 위해 미리암이 선창한 출애굽 승리의 노래 강강수월래(江江水越來)를 여성들로 하여금 춤추며 부르게 했다.

 

그 결과 애굽 군대처럼 일본 십자군은 명량해전(울돌목)에서 무수히 바다에 수장되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 조선 수군과 함께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겨우 군사 120명과 12척의 배로 적선 330척을 괴멸시키고 적군 1만 8천 466명을 수장 또는 사살한 세계 해전사에서 전무후무의 불가사의한 전승을 거두었다. 실로 기적 같은 승리였다. 그 이면에는 조선 미리암들의 강강수월래(江江水越來)라는 위대한 영적 전쟁의 춤과 노래가 있었던 것이다.

 

광화문 광장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임진왜란의 배후에는 천주교 예수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사칭하는 로마 교황이 방한 중이다.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출신 최초의 교황이다. 그를 위해 우리 정부는 수도 서울의 중심지인 광화문 광장을 바티칸 광장으로 바꾸어 주었다. 광화문은 대한민국의 심장이다. 더욱이 일본 십자군 장수 고니시와 혈전을 벌이고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동상도 서 있는 곳이다.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오늘 最多 17만 5000명의 천주교도들이 운집해(서울지방경찰청 집계) R.C 예수회 사제 교황을 알현했다. 교황을 초청한 박근혜 대통령은 범정부적으로 그들의 종교행사를 적극 지원했다. 한국 정부와 언론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全知全能(전지전능)하고 결점 없는 神처럼 대우하였다. 언론은 교황의 訪韓에 즈음하여서는 바티칸의 기관지처럼 선전과 홍보에 충실했다. 교황이 광화문 광장에서 집전한 소위 시복식 미사는 생중계되었다. 천주교가 대한민국의 국교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過恭非禮(과공비례)의 극치였다. 아주 놀라운 영적 사대주의다.

 

오, 왜군의 조총과 장검에 참혹하게 살육당한 조상님들이시여! 너무도 무지하고 순진한 이 시대의 후손들을 용서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자손들이 역사적 진실을 찾고 정의를 따르도록 도와주소서!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식 미사에 운집한 군중


http://m.cafe.daum.net/ALILANG/ETNE/350?q=D_s4Cw1hpst-Q0&svc=cafe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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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
2016.02.10 12:38 일본

그런 목적으로 그들은 일본으로 항해했다. 1549년 천주교 예수회 신부들이 탄 포르투갈의 상선이 일본의 바다에 도착하여서 일본의 어린 영주에게 그들은 화승총을 선물하였다. 그 화승총을 그 후 계속 보급하여서 일본으로 하여금 정복적 야욕을 뜨게 하는 첫 계획에 착수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아시아 선교의 첫발은 예수회 창설 멤버 중 한 사람으로 스페인 귀족 출신인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내디뎠다. 그는 총포를 선물하며 인도와 일본 포교에 평생을 바쳐 천주교 포교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며 카톨릭의 성인 반열에 올랐다.

 

조중화라는 임진왜란 전문가가 저술한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를 보면 ‘프란치스코 사비에르’라는 천주교 신부가 일본 땅에 1549년에 정식적으로 와서 포교를 시작하며 그와 함께 온 유럽인들이 화승총을 계속 보급했다고 하는데. 프란치스코 사비에르는 예수회 사제였다. 그는 포르투갈의 예수회 소속 신부였다. (26p~28p)

 

화승총을 조총으로 개량하고 삼단철포부대를 운영하여서 일본을 제패한 오다 노부나가는 천주교 예수회를 적극 후원하였다. (31p)  


조중화가 쓴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는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대를 이은 히데요시가 임진대전쟁을 일으켰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 대전쟁을 권유한 배후의 인물이 ‘고니시 유키나가’ 였다고 한다. (61P)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예수회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를 같이 데리고 다니며 신부들과 함께 조선 땅을 밟으며 온갖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게 한 이 인물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의 ‘간양록’에 보면 그가 소오 요시도시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을 할 것을 권유했다고 일본 국민들이 서로 수군수군거렸다고 말한다. (61p)


고니시가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분명하다. 천주교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조선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 등지를 차지하여서 그곳에서 자본을 많이 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장수 고시니의 군대가 사용한 군기들 기록화(일본 자료).

그림 하단에 조총을 어깨에 멘 왜병 옆으로 십자가 군기도 보인다.

  

예수회 신부는 틀림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속삭였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 예수회가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정복시켜줄 것이다.”

 

그래서인지 히데요시는 인도까지 정복할 수 있다고 너무나 자신만만했고 심지어 부채의 앞과 뒷면에다가 중국어와 조선어를 써서 달달 외웠다고 조중화는 말한다.

 

여기서 독자들이 명심해야할 바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예수회는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로마 카톨릭 조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실상 ‘다른 예수’ 즉 거짓 예수(적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다.

 

그들의 위험성을 알아차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무모한 전쟁이 끝난 이후 천주교인들을 일본에서 씨를 말려버리고 예수회를 추방시켰다.

 

그러나 예수회는 수백 년이 흐른 뒤 함포를 단 미국 함선들을 끌고 와서 일본 땅에 쏘아대며 협박하게 하여 결국 일본을 개항시키고야 말았다.

 

그리고 예수회는 메이지 유신을 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급속도로 일본 열도를 차지하고 일본을 부추겨 조선을 점령하게 하여서 천주교인들이 거기에 합법적으로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대원군이 예수회와 천주교인들을 목을 잘라가며 개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에서는 대원군 때문에 조선의 개화가 늦어져서 망했다고 대원군을 증오하게 만드는 역사교육을 시킨다. 한국의 교육체계가 예수회의 입맛에 맞게 교육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한국 천주교인들의 일부는 이 땅을 천주교 국가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 군함으로 나라를 침공해주든지, 아니면 압박을 해달라는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것이 대원군의 무서운 박해를 초래한 단초를 제공했다.

 

천주교인들이 성인이나 위인으로 존경하는 김대건 신부나 알퐁소 신부 조차 예수회 소속임은 알려진 상식이다. 이미 예수회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익히 알려진 존재이며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이순신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천주교를 잘 묘사하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산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하고

조령을 넘어 북진했던 고니시의 부대는

줄곧 큰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다.”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조선군을 공략하고 있는 고니시 장군 군대.
사진 우측의 십자가 군기를 보라. 

중앙에 보이는 깃발은 십자가와 천사의 나팔을 형상화한 고니시의 부대 마크이다.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장면)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철병을 명하면서 6년에 걸친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왜군은 철수를 서둘러야만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충무공은 목에 걸린 큰 가시였다. 앞길을 막고 있는 큰 바위였던 것이다.

 

충무공이 바다의 요충을 가로막고 있어서 도저히 해상 퇴각로를 뚫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니시는 퇴로를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베어 소금창고에 옮기는 작업을 계속했다.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벨 때에도 그의 진영에는 변함없이 비단 천에 열십자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조선 양민들의 베어진 목들이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에게는 제사상의 돼지머리보다 훨씬 처리하기 쉬운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 일본 만화 '수군장~소서행장전' 표지.

독실한 천주교 신자답게 고니시 유키나가는 십자가를 부착한 투구를 쓰고 있다. 

실제로 소서행장은 십자가가 달린 투구를 썼던 인물이다.

 

어느날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 양민의 목 수백 개와 함께 전령을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에게 보냈다.

 

“조선인의 목인지 일본군의 목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겠소? 이 수급들을 전과 보고용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시오. 남의 나라에 와서 힘들여 싸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소? 진린 장군께서는 이제 해상 퇴각로를 열어주시오. 우리는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오.”

 

하지만 충무공은 더 많은 왜군의 목을 베어 진린에게 보냄으로 퇴로를 열어주지 못하도록 했다.

 

예수회 사제가 종군신부로 참전한 일본 십자군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템플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형적인 ‘과시’였다. 그처럼 십자가 깃발 나부끼며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임진년(1592년) 4월 13일이었다. 바다를 뒤덮은 왜군(倭軍)의 배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렸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쟁인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그토록 비극적인 사건이 우리나라와 천주교의 최초의 만남이 되었다. 400여년 전 조선인들이 겪은 임진왜란은 한국판 십자군 전쟁이었다.  

 

“왜적의 배가 대마도에서 우리 바다로 오며 바다를 뒤덮듯 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징비록-

 

 

↑ 부산으로 침략하는 왜군 병선의 돛에 있는 십자가 표시를 보라.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장면)

 

 

↑ 왜군 병선의 돛에는 십자가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십자가 군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장면)

 

 

왜군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위이자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가

병선 수백 척에 병력 1만8700명을 이끌고 부산 영도에 상륙했다.

 군기로 십자가 깃발을 사용.

 

십자가 군기 휘날리며 돌격하는 기리시단(吉利支丹왜군(일본 자료)

http://ameblo.jp/constantinvs/ )

 

십자가 군기를 들고 있는 기수병들 앞에서 조준사격을 하고 있는 왜군 조총병들(일본 자료)

http://ameblo.jp/constantinvs/ )

 

↑ 조선 수군의 화포 공격을 받고 격침되는 고니시의 왜군 병선.

십자가 군기를 보라!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장면)

 


↑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의 화포 공격을 받고 분멸하는 왜군 병선.

십자가 군기를 보라!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부산포해전 장면(1592년 9월 1일).

 

 

↑ YTN 사이언스 "조선의 돌격함, 귀선" 캡처 사진

왜군 전함의 돛에 있는 십자가 표시를 보라.

http://www.youtube.com/watch?v=ZHuQ_ErmU04
 

↑ YTN 사이언스 "조선의 돌격함, 귀선" 캡처 사진

왜군 함선의 돛에 있는 십자가 표시를 보라.

 http://www.youtube.com/watch?v=2vr2hkPpwO4

 

↑ YTN 사이언스 "임진왜란의 숨은 병기, 승자총통" 캡처 사진

왜군 전함의 돛에 있는 십자가 표시를 보라.

 http://www.youtube.com/watch?v=2vr2hkPpwO4


1592년 4월 13일(선조 25년) 침략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예하부대 18,700여 명을 실은 700여 대의 함선으로 부산항에 쳐들어 왔다. 펄럭이는 십자가 군기를 달고서 말이다! 이 나라에 7년간의 대환난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무장한 조총은 조선인들의 생명을 앗아갔고 조선땅을 피로 물들였다.

 

독실한 로마 카톨릭 교회 신도인 고니시(소서행장, 사진)는 마치 교황의 군대 말타기사단처럼 십자가 깃발을 군기로 사용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진중에는 스페인 출신의 로마 카톨릭 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司牧)했다.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이자 조일전쟁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으로 전해지기도 하는 예수회 사제 세스페데스.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와서 경상도 일대의 해안지방에 약 1년간 머물면서 조선인에 대한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당시 상황에 대한 4통의 서간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소서행장은 세스페데스 신부더러 밤마다 미사를 올리도록 하자고 말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물론 휘하 병사들도 좋아했다. 그들도 로마 카톨릭 교회 신도들이었던 것이다. 소서행장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1584년에 영세를 받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영세명 아우구스티노로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그의 집안도 모두 천주교로 개종했다. 아버지의 세레명은 요나단, 어머니는 막달라, 대마도 성주의 부인인 딸은 마리아였다.

 

그가 거느린 장수도 대다수가 천주교인들이었다. 흑전장정(구로다 나가마다), 오도순현(고지마 쥰겐), 천초종원(아마쿠사 다네모토), 宗義智(소 요시토시) 등이 모두 일본의 기리시단으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일본에서는 천주교인을 기리시단(吉利支丹)으로 불렀다. 기리시단(吉利支丹)은 Christian의 포르투갈어를 일본어로 음역한 것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이 기리시단 부대가 십자가 군기 휘날리며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제1군이었다.

 

조일전쟁에 출전한 기리시단은 전체 왜군의 과반수에 근접한 병력으로 추산된다. 개신교 선교사로서 조선의 해안정찰과 통상교섭을 위해 온 귀츨라프(Karl Gutzlaff)는 그의 항해기에서 이렇게 썼다: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장군들은 대개, 전부 그리고 사병들도 대부분이 역시 천주교인이었다.”

 

블린클리(F. Blinkely)는 부산에 상륙한 25만의 왜군 중 최소한 10% 이상이 천주교인, 즉 기시시단이었다고 『대영백과사전 일본인 역사』에서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주력부대의 총수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독실한 천주교인이고 그의 예하 장군과 사병들이 천주교인이었다면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천주교인 부대 혹은 일본 십자군이라고 얼마든지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 군인들이 선봉이 되어 일으킨 임진왜란이 조선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혔는가를 살펴보면, 이 전쟁으로 조선인은 적게는 수십 만 명에서 최고 100만 명이 죽었고(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조선인 전체 인구가 940만 명 수준이었음. 즉 임진왜란으로 조선 백성 10명 가운데 1명이 죽었음), 농경지 60%가 파괴되었고, 10만 점의 문화재가 약탈되었고, 수많은 문화재와 민가와 관가와 궁궐이 불탔고, 10만 여명의 백성들이 왜국에 포로로 잡혀 갔다.

 

그들은 함선의 돛대엔 화살로 십자가를 만들어 달기도 했고, 돛엔 십자가를 그려 넣어 천주교인임을 표시했다. 십자가를 처음 본 조선병사들은 깃발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사실상 그들은 일본 십자군인 셈이었다. 그들의 잔학상이란 중세의 유럽 십자군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것을 압도했다.

 

↑ 십자군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반 2세는 광장의 대군중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 신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나는 여기서 분명히 약속한다.”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신이 바라신다”는 말에서 교황 앞에 다투어 십자군으로 원정에 나설 것을 맹세했다. 그 전쟁은 3백 년이 넘는 전쟁으로 비화 되었고, 십자군의 창칼과 화살에 의해 무고한 인명이 수천만 명이 도살되듯 죽어야 했다. 십자군은 이교도의 여자는 물론 점령국의 젊은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 다니며 십자군의 성적 노리개인 종군 위안부 노릇을 하게 했는데 수만 명이 넘었다.

 

특히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러 가는 도중에 도처에서 유대인 주거지를 습격해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후방에서도 신부들과 수도원의 수사들이 지휘한 도처의 대학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여졌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죽여서 너의 영혼을 구하라. 그 공로로 너의 연옥에서의 기간을 줄여라”라는 표어까지 내걸어 가며 자행되었다. “이교도인 회교도로부터 성지(聖地)를 해방시켜야 한다면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the Christ killer)을 먼저 처단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군이 제1차 원정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에는 예루살렘에 살던 모든 유대인들을 잡아 회당에 쓸어 넣고 불을 질러 몰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 십자군은 이 유럽 십자군의 악랄함을 능가했다. 왜군은 조선 땅에서 전쟁사에 보기 드문 야만적 죄악을 저질렀다. 진주성이 2차 전쟁에서 함락되자 일본 십자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다. 왜병들은 조선 여자를 보기만 하면 길거리든 대낮이든 사람들이 보든 말든 닥치는 대로 강간했다. ‘욕봤다’는 말은 이때에 생긴 것이다. 나부끼는 R.C 십자가 깃발 아래서 귀베기와 코베기도 자행되었다. 조선을 침공한 왜군들은 병사 1명당 코 한 되씩의 책임량을 할당 받았다. 그리하여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코를 베었다. 조선인의 잘린 귀와 코는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졌다. 히데요시는 그것의 수량으로 부하들의 전공을 가늠했다.

 

이씨단지 경상도 창원에 살던 손기후의 아내 정씨는 왜군들의 강간에 저항하자

왜군이 여인 정씨의 얼굴을 찌르고 사지를 베고 귀와 코를 잘라 가져갔다. 

(출처: 동국신속삼강행실도-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임진왜란 책).

 

 

김씨단두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산모 함경도 영흥 여인 김씨의 목을 베는 왜군.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머리가 마루에 떨어져 있다.

(출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천주교인 장수 구로다는 5,500개의 코를 벤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고니시와 다른 기리시단 장군들에 의한 코베기 숫자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그런 만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구로다가 그 증거이다. 되레 부산 전투에서 보인 살육과 방화 등 그 잔인성은 다른 부대의 왜군들과 다르지 않았다.

 

천주교 왜군의 잔인한 동래성 대학살  <--클릭

 

거의 모두가 카톨릭 신자로 이루어진 제1군의 고니시 부대, 일단 전쟁에 참여한 이상 이들의 행태는 다른 병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전쟁은 전쟁일 뿐이었다. 일본인 저자 ‘가다노 쯔기오’가 쓴 [이순신과 히데요시]는 고니시 부대가 부산진성을 점령한 전쟁상황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592년 4월 13일 아침, 고니시의 제1군은 부산진성에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성벽에 사다리를 걸쳤다. 성벽에 있던 조선 병사들은 사다리를 밀어냈다. 조선 병사의 무기는 짧은 활이 주류였으나 때로는 각궁이라 불리는 큰 활을 쏘았고, 돌과 불화살이라 불리는 대나무로 만든 소이탄을 사용하면서 주위에 화염을 일으켰다. 돌은 부녀자들이 던졌다. 이윽고 일본군은 성벽을 넘었다. 성 안에서는 조선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일본군들이 쏘는 조총의 탄환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조총의 위력을 모르고 있었다. 조총은 어떤 방패라도 아주 쉽게 뚫어버리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피로 물들은 사상자들이 쌓이고 있었다. 조선군은 퇴각하였고 일본군은 그 뒤를 좇았다. 싸움은 성 안쪽으로 옮겨갔다. 밀고 들어오는 일본군들은 도망가는 조선병을 좇아 성안 구석구석까지 몰려들어 닥치는 대로 베어버렸다. 일본도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성안은 피바다로 변해버렸다. 싸움이 시작된 지 2시간 반, 결국 성안에 있던 조선군사 1200명이 전사하였고, 민간인 2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 전사자들 가운데는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순국한 ‘정발’장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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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
2016.02.10 12:37 일본

=> 아래의 글은 (무종교인) 저도 '모르고 있던 역사'라서 가져온 글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사실로서 인식할 때 미래가 밝아지기 때문에 퍼온 글입니다. 

원글이 길어서 몇 부로 나누어서 소개합니다. 



한국과 로마 카톨릭의 첫 만남은 참으로 불행했다.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군단의 병사들은 대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 신자들이었다.


조선 침략 군단의 이름은 ‘그리스도단’(기리시단, 吉利支丹)이고, 그 침략 군단 앞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검정색 사제복에 ‘로만 칼라’를 한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들이 뒤따랐다.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었다.


예수회 사제들은 조선인을 잔혹하게 살육한 자들의 고백성사를 받아주고, 이른바 ‘성수’를 뿌리면서 조선침략 행렬에 가담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와 민족은 큰일 날 뻔했다.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현재 카톨릭 수도회 중 가장 많은 신도와 사제수를 자랑하는 최대의 분파다. 제수이트(Jesuit) 또는 한자음을 따 '야소회(교)'로도 불린다. 남미 출신으로 첫 카톨릭 수장이 된 교황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출신 최초의 교황이기도 하다.

 

↑ 십자가 군기를 앞세우고 조선을 침략한 왜군 주력부대 기리시단(吉利支丹) 군단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장면 캡처 사진)

 

↑ 십자가 군기를 펄럭이며 조선을 침공한 왜군 선봉부대 기리시단(吉利支丹)군 장수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캡처 사진)

 

↑ 조선을 침략한 왜군 주력부대 기리시단(吉利支丹)군 장수들의 작전 회의.

막사 정면 중앙에 십자가 군기가 걸려 있다.

 

↑ 작전회의 중인 왜군 장수 고니시

 

↑ 작전회의를 진행중인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극중 고니시 장군의 캡처 사진)

 

↑ 작전회의 중인 고니시 장군의 뒷편 엠블럼.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 마크 중 하나로 십자가와 천사의 나팔을 형상화했다.

 


↑ 임진왜란 장수 고시니가 사용한 십자가들


1549년 7월,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천주교를 허용한 일본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과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당시 천주교가 포교에 열을 올린 것은 새로 생긴 개신교가 새로운 나라나 대륙에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들어가서 선점하기 위한 것으로서, 일본에 조총(鳥銃)을 전수한 예수회의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Francesco Xavier, 1506-1552)는 카톨릭 사제로 예수회 창립 멤버 6인 중 한 사람이다.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Francesco Xavier, 1506-1552)

 

그리고 천주교가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천주교는 막강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세스페데스 신부(예수회)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군에 종군하여 조선에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에는 천주교에 개종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1611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天家康)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무려 21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순교하였다.

 

콘스탄틴 이후 바빌론 종교와 그리스도교를 혼합해 만든 거짓 그리스도교인 로마 카톨릭은 마틴 루터 같은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등장으로 인해 교황은 불안했고 종교재판으로 개혁교회를 뿌리뽑아 없애려 하던 도미니크 수도회도 좌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지식에 해박하고 정치적 식견이 풍부한 뛰어난 전략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교황을 알현하여서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세상의 종교를 교황청을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곧 반동종교개혁의 일환인 ‘예수회(Jesuite)’를 개신교를 박멸하기 위해 창설했다.

 

로욜라는 천주교에선 <성 이냐시오>로 불린다. 그가 창립한 예수회의 지부는 바다를 건너고 산맥을 넘고 대항해를 하며 어디든지 못간 곳이 없었다. 그들은 곳곳에 지부를 설립하고 거짓 그리스도교 신앙을 알리며 정치인들이나 상인들과 거래했다. 우리나라 서강대학교도 예수회가 설립한 대학이다.

 

↑ 예수회의 본당인 로마 Jesu 성당 내부의 조각상

교황권을 적그리스도로 이해했던 루터와 쯔빙글리 같은 교회의 이단자들을

어머니 교회(십자가를 든 여자, 로마 카톨릭 교회를 상징)가 제거하는 것을 보여주는 조형물이다.

조각상에서 작은 천사는 성난 얼굴로 개혁자들의 책의 페이지들을 찢어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여인의 발에 밟혀 있는 예수회의 적들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즉 모든 개신교도들이다.

카톨릭 교리에서 개신교도는 언젠가는 진멸돼야 할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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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
2016.01.05 17:04 일본

후쿠시마와 그 인근산 사케가 한국으로 수입량이 2011년부터 합하면 총 4300여 톤

일본쌀과 지하수는 오염된 상태인데 사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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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
2015.12.26 17:46 일본

위안부 문제 조기 타결을 위해 갑작스레 한일 외무장관 회담을 제안한 일본 정부가 이번 회담에서 미국 정부의 성명 발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26일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이 보도했다.

요미우리는 "미국 정부의 성명 발표를 검토하는 것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한국이 다시 문제 삼지 않도록 확실히 마무리 짓기 위함이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24일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는 갑작스레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에 위안부 문제 최종 타결을 위해 연내 방한을 지시했다고 일본 언론은 보도했다. 이에 한국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오는 28일 기시다 외무상은 서울에서 윤병세 외무부 장관과 회담을 하게됐다. 

26일 NHK보도에 따르면, 기시다 외무상은 이번 회담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재산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위안부를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기금 창설을 타개책의 골자로 제안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가 이번 회담에서 제안할 '새로운 기금'의 규모는 1억엔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기금의 규모를 둘러싸고 한국 측과 큰 차이가 있어 한국 측과 계속 조율하고 있다고 NHK는 설명했다. 

그러나 그 동안 기금의 규모에 관해 한국 측이 수십억엔(수백억 원)의 규모를 요구해 일본 측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NHK는 한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또한, 일본 측은 두 번 다시 이 문제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한국 정부의 확약과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의 철거 등도 요구하고 있다. 

한일 양국정부는 외무장관회담 전날인 27일에도 서울에서 외무성의 국장급 협의를 갖는 등 위안부 문제 타결을 위한 조율을 할 예정이다. 

한편, 기시다 외무상은 25일 "매우 어려운 문제지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최대한의 조정을 하고싶다"라고 기자단에게 말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226_0010499567&cID=10101&pID=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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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
2015.11.10 15:49 일본

“대학은 졸업했지만….”


1930년대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이다. 대학은 졸업했지만, 취직자리가 없어서 절망했던 일본 젊은이들의 자조 섞인 푸념이었다(지금의 대한민국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1929년 불어 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엔 실업자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일본에 위기가 닥쳤다. 단순히 경제위기로만 바라볼 문제가 아니었다. 대공황으로 일본은 또다시 ‘전쟁국가’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デモクラシー)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정당정치를 발전시키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군비를 삭감하고, 이렇게 확보한 재정으로 산업발전에 투자하고, 악화일로를 걸었던 해외 열강들과의 화해 분위기를 경제협력으로 이끌어 일본의 발전을 이룩한다’는 이상적인 구도, 이 모든 생각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일본은 전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군(軍), 움직이다


1930년 말 만주에 체류하는 일본인의 수는 22만 8,700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많은 숫자의 일본인이 만주에 진출한 데에는 ‘국방사상 보급 운동’이라는 일본군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당시 일본 육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국방사상(‘만주 설명회’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겠지만)을 보급했다. 


“만주에는 기름진 평야가 널려있다. 이게 원래는 중국 땅이지만, 당장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이걸 그냥 포기해? 본토에서 굶어 죽느니 만주 가서 인간답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


“만주는 우리 장병 20만의 피로 획득해 얻은 곳이다.”


일본 군부는 대공황으로 시작된 경제위기의 탈출구와 인구과잉으로 신음하고 있는 인구의 배출구로 만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만주의 완전한 확보’라는 군사적인 목적도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만주로 가는 발판을 만들고, 만주를 확실히 다져 소련 침략의 거점으로 만든다. 이게 일본 육군의 생각이었다. 여기에는 조급함도 있었다.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한 상황에서 언제 만주로 총구를 돌릴지 모르는 상황이라 만주를 확실하게 다져놔야 했다. 


Untitled-1.jpg  

'만철폭파사건'으로 불리는 관동군의 조작 사건이 만주사변의 불씨가 됐다.


1931년 9월 18일, 봉천 근처의 만철선 위에서 폭발 사건이 터졌다. 관동군(만주에 주둔했던 일본 육군부대)의 음모였다. 당시 관동군은 공격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고, 이 폭발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있는 중국군(장학량의 군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만주사변’이 터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사실을 통보 받았을까? 당시 일본 외무대신인 시데하라 기주로(幣原)가 이걸 안 건 9월 19일 아침 신문에서였다. 시데하라는 긴급 각료회의를 열고 전쟁의 확대 방지를 천명했지만, 누구도 관동군을 제어할 수 없었다(태평양 전쟁 당시 대본영이 나서도 관동군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일본이 망한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이 만주를 함락한다. 만주 전체를 장악한 것이다. 관동군은 정부와 군부의 견제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만주 각 지역을 돌며 만주국 건국 운동을 벌이도록 선동한다. 이미 1931년 11월 8일 천진에서 폭동을 일으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를 만주로 데려온 상태였다. 


헨리푸이.jpg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는 만주국 1대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이 탄생한다. 인구 3천 4백만, 한반도 면적의 5배나 되는 나라가 몇 달 만에 탄생한 것이다. 이런 만주국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서가 하나 있는데, 바로 푸이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에게 보낸 서한이다. 


1. 폐국(弊國)은 금후 국방 및 치안 유지를 귀국에 위탁하고 그 소요 경비를 모두 만주국이 부담한다.


2. 폐국은 귀국 군대가 국방상 필요로 하는 한, 기설(旣設) 철도, 항만, 수로, 항공로 등의 관리 및 신로 부설을 모두 귀국 또는 귀국이 지정하는 기관에 위탁함을 승인한다.


3. 폐국은 귀국 군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각종 시설에 관해 극력 이를 원조한다.


4. 귀국인으로서 달식명망(達識名望) 있는 자를 폐국 참의로 임명하고 기타 중앙 및 지방 관공서에 귀국인을 임명하되, 그 선임은 귀국 사령관의 추천에 따르고 해직은 동 사령관의 동의를 요건으로 한다.


5. 상기 각항의 취지 및 규정은 장래 양국 사이의 정식으로 체결할 조약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만주국은 청나라의 후신일까? 아니면 일본의 식민지일까? 둘 다 틀렸다. 만주국은 ‘관동군의 나라’였다. 일본 정부는 만주사변이 시작될 때부터 이를 반대해 왔지만 이미 일본의 군부는 민간의 통제를 벗어난 조직이었다. 


일본 군부에게 만주는 러일 전쟁 당시 20만 명의 일본 장병이 피를 흘려 얻은, 특별한 곳이었다. 일본 군부는 만주는 일본의 생명선과 같은 곳이라며, ‘만주생명선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생명선이 위협받고 있었다. ‘워싱턴 체제’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확보했던 21개조 요구를 위협받았고, 급속한 공업화로 소련이 옛 러시아의 위세를 회복하는 듯 보였다. 여기에 더해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조만간 중국과 충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해 직접 통치하지 않고 번거롭게 ‘만주국’을 만들었던 것일까? ‘워싱턴 체제’ 때문이었다. ‘9개국 조약’이 걸려 있던 것이다. 9개국 조약은 1922년 워싱턴에 회의에 참가했던 미국,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일본, 중화민국이 맺은 조약으로, 중국의 영토 보전과 독립된 주권의 확인을 핵심으로 한다.


여기에 하나 더 걸린 것이 1928년 8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부전조약(不戰條約)’이다. 한마디로 ‘전쟁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물론 자위권 발동 차원의 전쟁은 인정하지만 국제 분쟁의 해결을 위해 전쟁을 수단으로 삼지 말자는 내용을 담은 조약이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을 포함한 15개국이 우선 조인한 상태였다. 


관동군은 이 조약을 피해가기 위해 ‘만주국’이라는 유령회사와 푸이라는 바지사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렇게 되면 관동군은 명목상 중국을 침략한 게 아니라 중국과 별개인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이 된다. 이에 대한 일본 군부의 판단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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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초대 내각의 면면


1932년 1월, 육군, 해군, 외무성은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


“만주국은 만주에 거주하는 만주인들의 자발적 분리 독립이다.”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만주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미국의 개입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미국과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갈라섰고, 이후 태평양 전쟁까지 악화일로를 걷는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다


1932년 5월 15일, 일본 해군 장교들이 일본 총리를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5.15 사건’이다. 당시 젊은 해군 장교들은 런던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했던 전직 총리인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를 암살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와카쓰키가 선거에서 패해 퇴진하자 와카쓰키 대신 정부를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결국 이들은 총리관저를 습격해 당시 총리였던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를 암살한다. 놀라운 건 체포된 이들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응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이들을 석방해야 한다며 구명운동을 벌였는데, 탄원서에 서명한 이들만 35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백주대낮에 일국의 총리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모의한 이들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다니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가? 당시 일본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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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사건’을 보도하는 아사히 신문


문제는 꿩 대신 닭이라고,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대신 죽은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가 일본에게는 너무도 아까운 인물이란 점이다.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민주 운동가로, 폭주하던 군부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김옥균과 쑨원(孫文)을 지지한다고 말할 정도니 어떤 성정의 인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군부의 압박에 못 이겨 만주국의 당위성을 설파 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끌어 나가 군부의 독주를 차단하고 민주주의를 성장시킬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건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그가 암살을 당하면서 일본은 완전한 전쟁국가로 달려간다. 이는 그의 뒤를 이은 30대 총리 사이토 마코토(斎藤実)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사이토 마코토는 해군 대장 출신이었다. 그러니까 군부출신 인사가 총리에 오른 것이다. 


그가 재임기간 동안 내놓은 최고의 업적(?)은 만주국의 정식 승인이었다.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한다.”


그가 중의원에서 했던 말이다. 당시 국제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일본은 고립무원의 길로 달려가고 있었다. 


중국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마자 국제연맹에 제소한다(1931년 9월 21일). 뒤이어 미국은 만주사변의 책임은 일본에 있다고 선언했고, 1932년 1월 7일엔 만주 사태에 대한 불승인 방침을 천명한다. 국제연맹도 발 빠르게 대응했는데, 1931년 12월 10일 만주사변에 대한 실지조사단 구성을 결의해 영국의 리튼(Victor A. G. B. Lytton) 백작을 위원장에 임명한다. 리튼 백작은 4개월간의 조사를 통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국제연맹에 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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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의 폭발한 부분을 조사 중인 리튼 조사단


‘리튼 보고서’에서 리튼은 일본이 ‘9개국 조약’을 위반했다고 말하며, 이에 따라 만주에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했다(일본에 대한 배려 차원으로 일본의 권익도 인정했다). 


리튼 보고서는 1933년 2월 24일 국제연맹 총회에서 42 대 1(1은 일본이었다)로 채택됐다. 당시 전권대표였던 마쓰오카 요우스케(松岡洋右)는 마지막 연설에서, 


“어떤 나라에게나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는 사활적인 문제가 있는데, 일본에게는 바로 만주 문제가 일본인의 생사가 달려있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사활적 문제다.”


라고 말하고 국제연맹의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다. 


1933년 3월 27일, 일본은 정식으로 국제연맹의 탈퇴를 통보한다. 이후 일본의 행보는 전쟁을 향해 달려가는 형세였다. 그리고 1934년 일본은 지난 10여 년 간 족쇄(?)가 됐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체제를 탈퇴한다. 영국은 끝까지 일본의 복귀를 기대했지만, 일본은 이런 영국의 기대를 배신했다.


드디어 해군휴일이 끝났다. 조약 시대에 묶여있던 해군은 이제 무조약 시대를 맞이해 다시 한 번 건함경쟁에 뛰어들 채비를 한다. 



마치며 


‘워싱턴 체제’가 붕괴된 지 3년 만에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이란 미증유의 대전쟁을 겪는다. 워싱턴 체제가 잡아챈 고삐의 위력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일까? 


만주사변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워싱턴 체제’마저 이탈한 일본은 이제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전쟁의 길로 달려간다. 1937년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그 이후 9년간 일본은 중국과 미국이란 늪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1941년 여름 일본의 가장 유능한 인재 35명이 극비에 소집 돼 ‘총력전 연구소’를 설립한다. 여기에 참여한 인재들은 일본 각계를 대표하는 조직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미국과의 전쟁에 앞서 ‘과연 미국과 전쟁을 치른다면 이길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그들은 일본과 미국의 국력을 면밀히 비교했고, 전쟁 상황에서 벌어질 상황을 예측했고, 수많은 변수들을 확인했다. (이 이야기는 책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전쟁을 강행했다. 


묻고 싶어진다.  


“일본은 어째서 전쟁을 선택했던 걸까?”


다음 회에는 외전 형식으로 ‘마지노선’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나면 전쟁국가 일본이 치른 전쟁 중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태평양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중일전쟁으로 시작해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국가 일본의 ‘최후의 불꽃’을 이야기할 거다. 

http://www.ddanzi.com/ddanziNews/51070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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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
2015.10.30 21:35 일본

문제는 산청에 조성되는 일본인 마을이 조성비 70%를 국민의세금 국조로 쓴다고한다.

포항 구룡포(일본인마을).

경주(일본인마을). 산청(일본인마을.금정전원마을2015년착공완료),

경남 남해(일본인 마을 조성중),서울동부이촌동(많은일본인거주).전북장수(계획진행중)

http://m.bbs1.agora.media.daum.net/gaia/do/mobile/debate/read?bbsId=D115&articleId=2758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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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
2015.10.30 15:18 일본

 Oct 28


중국이 남중국해에 인공섬을 개발해서 영해를 주장한다며 미국 일본이 방방 뜨고 있는데 


정작 그런짓은 일본의 주특기다 


태평양 한복판 해수면 위로 60cm 돌출한 암초에 시멘트를 때려붓고선 자국영토라며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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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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