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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9 16:15 역사와 법

원구단 전경 1897년
고종은 소공동에 원구단을 축조하고 이곳에서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옛 원모습)

이 단(壇)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으로 광무 원년(1897)에 조성되었다. 원구단은 환구단(환丘壇)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다. 

우리나라에서 제천(祭天)의 의례는 고대로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문헌상에 나타나며, 그 같은 전통의례가 원구제(圓丘祭)로 제도화한 것은 고려 성종 때 부터였다. 원구제는 고려 때 행하여져 왔고 조선시대에도 행해졌으나 태종 이후 여러 차례 폐한 일도 있었다. 원구단은 화강암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는 황색으로 칠한 원추형(圓錐形)의 지붕이었다. 원구단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년 원구의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모시면서 태조를 추존하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로 삼았다. 1913년 4월에 조선총독부가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평의 총독부 철도조선호텔을 착공, 이듬해 준공하였다. 이 건물은 1968년에 헐리고 지금의 조선호텔 건물로 대치되었다.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팔각정의 황궁우는 지금도 남아있다.

원구단 전경 1897년
고종은 소공동에 원구단을 축조하고 이곳에서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옛 원모습)

일본에 의해 황궁우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하기전 모습

일본에 의해 황궁우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하기전 모습

서울의 성벽 중앙좌측에 황궁우가 보인다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원구단 황궁우(39)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고종의 꿈 서려 
1899년 지은 8각 3층 건물… 자주독립의 의지 담긴 제157호 사적지

▲ 원구단 계단 답도와 해태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에서 조선호텔 쪽을 바라보면 빌딩 사이 작은 공원 위로 팔각정자처럼 생긴 건물이 보입니다. 고종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던 원구단(圓丘壇)의 황궁우(皇穹宇)입니다. 조선호텔, 프레지던트호텔, 롯데호텔과 빌딩에 둘러싸여 숨도 못쉴 것처럼 답답하였으나 서울시가 광장 한편의 빌딩 하나를 사들여 헐어내고 그 자리에 작은 공원을 내서 숨통을 터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하늘에 제를 지내던 장소가 여러 곳 있습니다. 풍수 전문가들의 말로는 모두 지기가 강한 생기처(生氣處)랍니다. 그 중 하나인 강화 마니산 참성단을 지기탐지기로 측정해본 결과 이름난 명당이 1분에 20~30회 정도 회전하는 데 반해 분당 65회전을 할 만큼 기가 강한 곳이랍니다. 기가 강한 만큼 기도의 효과도 크답니다. 원구단 터도 기가 엄청 센 곳으로 고종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던 원구단과 황궁우, 석고단(石鼓壇)이 있었으나 일제가 원구단을 헐고 호텔을 지어서 조선의 지기를 막아버렸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황궁우와 석고단뿐입니다.

▲ 원구단 동쪽문

▲ 원구단 정문

황궁우의 정문은 돌과 벽돌로 지은 특이한 문으로 조선호텔에 바짝 붙어있어 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문으로 오르는 계단 중앙의 답도에는 용을 새겼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답도는 봉황문양이나 황궁우는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에 세운 것이라 중국과 동등하게 격을 높인 것입니다. 답도 좌우측에 배치한 해태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솜씨를 발휘한 작품으로 표정이 풍부합니다. 이런 솜씨가 궁궐건축이 이어지지 못하면서 맥이 끊겨 버렸습니다. 지금은 궁궐 석조동물의 이름도 모르는 것이 있을 정도입니다.

고종 36년(1899)에 지은 황궁우는 석조기단을 8각으로 높이 쌓고 그 위에 세운 8각 3층 건물입니다. 밖에서 보면 3층으로 보이나 안에는 통층입니다. 내부에 3층 지붕까지 지탱하는 팔각기둥 8개를 둥글게 돌려 세웠습니다. 1층 바깥에는 모서리마다 3개의 팔각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윗부분과 창방의 아래에 파련각(波蓮刻)한 장식을 돌려붙여 화려합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각 전돌을 깐 바닥 위에 천신과 지신을 모신 작은 철제 가구 2개가 보입니다.

▲ 원구단 토수

▲ 원구단 해시계

짙은 청색 보를 덮은 것이 천신이고 황색 보를 덮은 것이 지신이랍니다. 보자기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여 서울 중구청 문화재과에 물어보니 상징물일 뿐 아무것도 없답니다. 2층 지붕과 3층 지붕 사래 끝에 토수가 끼워져 있습니다. 사래가 비를 맞아 썩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입니다. 본래 모두 청동토수였으나 근래에 흙으로 만든 토수로 갈아 끼운 것이 보입니다. 

돌 북 3개 나란히 세워둬

지붕 추녀마루 잡상은 맨앞에 삼장법사, 그 다음이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순으로 늘어서서 잡귀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돌 북 3개를 나란히 세운 석고단은 고종 즉위 40년(1902)을 기념하여 세운 것입니다. 몸통에 새긴 용무늬의 조각 솜씨가 뛰어난데 마모가 되지 않아서 갓 만든 작품처럼 산뜻해 보입니다. 나라 안에 단 하나뿐인 돌 북으로 용 문양을 연구하는 분에게 꼭 찾아보라고 권하는 명작입니다.

하늘의 자손을 자처하는 우리 민족은 환웅 때부터 영고탑을 세우고 하늘에 제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황제만이 하늘에 제를 지낼 수 있다는 이유로 고려 말 우왕 11년(1385)에 폐지됩니다. 나라가 힘이 약해지면 제사도 마음대로 못하게 됩니다. 원구단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이 마지못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 원구단 석고

고종 34년(1897) 조선의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남별궁터에 원구단을 건립합니다.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정하고 그해 10월 12일에 고종이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합니다. 그러나 그날 참석하였던 외국 외교관들은 “이처럼 즐겁지 않은 황제 즉위식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기록을 남깁니다.

당일 아침 고종은 “꿈에 선왕이 나타나 노한 얼굴로 ‘예로부터 내려온 유풍을 변혁해서는 안되느니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은 고종은 40명이 메는 화려한 대련을 타지 않고 4명이 메는 소련을 타겠다고 화를 내는 등 까탈을 부리며 출발을 지연시킵니다. 겨우 떠난 행렬은 도중에 내부대신 박영효가 낙마를 하는 불상사까지 생깁니다. 고종의 한숨이 늘었겠지요. 여하튼 고종은 천지제를 올리고 황제에 오릅니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중화전으로 옮겨 잔치를 하며 왕세자를 황태자로 책봉합니다.

원구단은 사각형으로 쌓은 벽돌담 안에 다시 원형 벽돌담을 두르고 그 안에 화강석으로 3단의 단을 올렸습니다.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는 이치에 맞춘 것입니다. 각 단마다 여러 신을 모셨지요. 맨 위 석단에는 원추형 지붕을 세웁니다. 지붕은 황금색이었답니다.

▲ 원구단 옛사진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제는 1913년 원구단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지어서 조선의 맥을 누르려 합니다.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호텔을 헐고 원구단을 복원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도 황궁우 마당이 호텔의 정원처럼 보이는 현실이 더 안타깝지요.

황궁우와 석고는 역사는 짧지만 건축 기법이 특이한 소중한 유물로 자주독립의 의지가 담긴 곳입니다. 보물쯤 되려니 하고 살펴보니 사적지 제157호랍니다. 일제야 당연히 문화재 지정을 하기 싫었겠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달리 대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구단을 보시고 난 후 고종황제가 말년을 보낸 경운궁(덕수궁)을 돌아보면서 구한말의 역사를 되짚어 보세요. 어린 자녀에게는 나라의 힘이 부족하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주셔서 장래를 튼튼하게 만들어주시고요.

그림ㆍ글ㆍ사진=김영택 펜화가(honginar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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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속